Refugee Trek 난민들의 고된 여정
Koreans Fleeing Pyongyang braving the icy waters of the Taedong River. Photographed: December 10, 1950. Bettmann Collection/CORBIS
대동강의 살얼음판을 건너서 평양을 떠나 피난가는 사람들. 촬영: 1950년 12월 10일. Bettmann Collection/CORBIS
고 난 의 피 난 길
(다음은 영문 인터뷰 발췌본을 관람객 여러분의 편의를 위해 한역한 것입니다.) 그래, 미군들이 우리 마을로 왔어요. 시내에서 전투가 있을 거라고 했지요. 그래서 형부가 우리도 피난을 가야 된다고 했어요. 1950년 12월 5일, 내 나이 16살 때였지요. 우리 언니 한테 아이가 셋이었는데, 하나는 제 등에 업혔지요. 우리 마을은 텅 비어 귀신이 나올 지경이 었어요. 우리는 그 유명한 대동강을 건너야 했는데, 나룻배에 사람이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배에 물이 들기 시작했지요. 사람들이 우리를 밀치기 시작하고 얼음을 깨고, 고함을 지르고, 아우성을 치고. 사방에 불이 나고 그게 바로 전쟁이었어요. 언니의 아기가 울어댔는데, 아주 갓난 아기였거든요. 언니의 시어머니는 아기를 버려야 된다고, 공산주의자든 누구든 그 울음 소리를 들을지 모르니까 그 아기를 버려야 된다고 계속 그랬어요. 매일 그런 식으로 왔어요. 새벽 6시부터 걸어서. 28일 동안 그렇게 걸어 왔어요.
최경숙
모두들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있었어요⋯ 아이들은 등에 업고... 사람들의 행렬이 전쟁터를 통해 끝없이 이어졌지요. 어떤 사람들은 손수레를 끌었고, 어떤 사람들은 우마차를 탔어요. 내가 몹시 아플 때 어떤 이가 수레에 나를 태워줬지요.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다른 방향으로 가야 됐고, 난 아버지의 친구분과 딴 작은 마을에 묵었어요. 다음날 아버지가 계신 집으로 갔는데, 아버지는 방금 떠나고 안 계셨어요. 몇 시간 차로 길이 엇갈린 거죠. 박송자
그렇게 해서 모두 임진강에 도착했는데, 미군과 남한군, 남한 여자순경들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총을 겨누면서 “못 온다”고 했어요. 그래서 “왜?”냐니까 “북한군 때문” 이라고, “누가 군인이고 누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그랬지요. 그래서 모두들 멈춰 서서 고함을 지르고 아우성을 쳤어요. 그러다가 다들 여기서 죽으나 건너다가 죽으나 마찬가지 라고 했죠. 강이 전부 얼어 있었어요. 형부가 엉금엉금 건너가던 중에 물 속에 빠졌어요. 언 강물 위로 가 형부와 조카를 돕고 싶었지만, 뒤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잡아당기면서 “너는 너무 무거우니까 얼음이 깨지고, 그러면 우리도 못 건너간다”고 했어요. 그걸 뿌리 치고 뛰어갔지요. 조카는 목끈이 있는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모자만 간신히 잡을 수 있었어 요. 모자를 당겨 조카를 물 속에서 꺼내려니까 조카가 소리를 지르고 울었어요. 목이 졸린 거죠. 내가 그러고 있는 중에 미군 한 사람이 와서 나를 도와 형부와 조카, 짐들을 꺼냈어요. 그러고 나서 우리 몸을 샅샅이 수색했지요. 무기가 있나 보려고. 그게 바로 크리스마스 날 이었어요. 그런 뒤 우리는 이리라는 곳의 수용소에서 삼년을 머물렀어요. 수용소에 도착했 을 때는 이미 두 아이가 죽은 뒤였어요. 가장 큰 아이하고 내가 업고 있던 아기하고.
최경숙
Koreans Fleeing Pyongyang braving the icy waters of the Taedong River. Photographed: December 10, 1950. Bettmann Collection/CORBIS
대동강의 살얼음판을 건너서 평양을 떠나 피난가는 사람들. 촬영: 1950년 12월 10일. Bettmann Collection/CORB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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